
AI가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동시에 반도체 자체의 설계 방식도 바꾸고 있다. 생성형 AI를 이용해 엔지니어의 작업을 지원하는 수준을 넘어, 여러 AI 에이전트가 서로 협업하면서 장시간 설계 작업을 수행하고 결과를 스스로 검증하는 ‘에이전틱 AI’가 EDA(Electronic Design Automation)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부상하고 있다.
앵커 굽타(Ankur Gupta) 지멘스 디지털 인더스트리 소프트웨어 지멘스 EDA IC 제품 부문 수석 부사장은 ‘Siemens EDA Forum Seoul 2026’ 기자간담회에서 이러한 변화를 ‘AI-Native EDA’로 정의하고, AI 시대의 반도체 설계 복잡성을 해결하기 위한 지멘스의 기술 전략과 로드맵을 소개했다.
굽타 수석 부사장은 특히 한국을 글로벌 반도체 산업과 AI 칩 설계를 주도하는 핵심 시장으로 평가했다. 그는 “한국은 메모리 분야의 리더일 뿐 아니라 AI 칩과 가속기 설계에서도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며 한국 고객과의 협력 중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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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 굽타(Ankur Gupta), 지멘스 디지털 인더스트리 소프트웨어 지멘스 EDA IC 제품 부문 수석 부사장
AI 시대, 반도체 설계를 바꾸는 4가지 변화
굽타 수석 부사장이 바라보는 반도체 산업의 변화는 크게 네 가지다. 첫 번째는 ‘AI Everywhere’다. AI가 일상과 산업 전반으로 확산하면서 향후 대부분의 칩에 AI 가속 기능이 통합될 것으로 예상된다. 두 번째는 ‘Software-Defined Everything’이다. 소프트웨어 정의 차량을 넘어 하드웨어 역시 소프트웨어와 함께 설계하는 HW·SW 코디자인이 확대되고 있다.
세 번째는 서로 다른 공정 노드와 다양한 종류의 칩을 첨단 패키징으로 결합하는 이종 통합(Heterogeneous Integration)이다. 마지막은 전력 효율과 지속가능성이다. AI 프로세서의 전력 소비가 급증하면서 개별 칩에서 몇 퍼센트의 전력만 줄여도 대규모 시스템과 데이터센터에서는 상당한 에너지 절감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반도체 설계의 복잡성을 크게 높인다는 점이다. 지멘스는 이에 대응하는 AI-Native EDA 전략을 속도(Speed), 생산성(Productivity), 신뢰할 수 있는 결과(Trusted Outcomes)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추진하고 있다.
굽타 수석 부사장은 특히 ‘신뢰할 수 있는 결과’를 강조했다. 반도체 설계에서는 작은 오류 하나가 칩의 실패나 수율 저하로 이어져 막대한 손실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AI가 설계 과정에 깊숙이 들어오더라도 최종 결과의 정확성과 신뢰성을 보장하는 EDA 엔진의 역할은 오히려 더욱 중요해진다는 설명이다.
동시에 기존에는 엔지니어가 직접 수행해야 했던 실행 환경 설정이나 로그 수집 등의 작업을 생성형 AI와 에이전틱 AI로 자동화한다. 이를 통해 엔지니어가 반복적인 실행 업무에 쓰는 시간을 줄이고 실제 설계와 혁신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하도록 하는 것이 지멘스가 말하는 생산성 혁신이다.
엔지니어가 퇴근한 뒤에도 설계·검증 이어가는 AI 에이전트
이날 발표에서 AI-Native EDA의 미래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준 것은 굽타 수석 부사장이 소개한 장시간 실행 자가 검증 에이전틱 AI(Long-running Self-verifying Agentic AI)였다.
굽타 수석 부사장은 엔지니어가 하루 업무를 마치면서 AI에 작업을 맡기는 상황을 예로 들었다. 엔지니어가 퇴근하면서 “이 작업을 끝내 달라”고 지시하면 여러 AI 에이전트가 서로 소통하며 밤새 작업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이는 단순한 개념에 그치지 않는다. 지멘스는 엔비디아와 함께 여러 에이전트가 협력해 작업하고 스스로 결과를 검증하는 장시간 에이전틱 워크플로우를 구현하고 있다.
지멘스의 EDA AI 기술도 빠르게 진화했다. 2025년에는 Fuse EDA AI 시스템에 생성형 AI와 자연어 기반 인터페이스를 도입했고, 2026년 3월에는 이를 단일 AI 에이전트 기반 시스템으로 발전시켰다. 이어 같은 해 7월에는 여러 에이전트가 협업하면서 스스로 결과를 검증하고 장시간 작업까지 처리하는 멀티 에이전트 단계로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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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emens EDA Forum Seoul 2026
AI가 판단하되, EDA 엔진이 결과를 검증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AI 에이전트에게 모든 판단을 맡기는 것이 아니다. 지멘스가 강조하는 자가 검증의 핵심은 AI의 추론을 실제 반도체 물리와 수학적 알고리즘에 기반한 EDA 엔진과 연결하는 것이다.
굽타 수석 부사장은 “반도체 물리를 다루기 때문에 모든 것은 과학적 원리에 기반한다”며 반도체 설계 데이터와 EDA 엔진이 결과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고 설명했다. AI가 작업을 수행하더라도 검증된 EDA 엔진을 통해 지속적으로 결과를 확인함으로써 생성형 AI의 불확실성을 엔지니어링 환경에서 통제하겠다는 접근이다.
이를 위해 지멘스는 엔비디아와의 협력도 확대하고 있다. NVIDIA NeMo Gym을 이용해 에이전트 역량을 최적화하고 Nemotron 모델을 통해 토큰 효율을 높이는 한편, OpenShell을 이용한 보안 샌드박싱과 CUDA-X 기반 가속 컴퓨팅을 EDA 환경과 결합하고 있다.
실제 반도체 설계에서도 멀티 에이전트 적용이 시작됐다. 예를 들어 사용자가 서로 다른 공정(Process), 전압(Voltage), 온도(Temperature) 조건에서 라이브러리 특성화를 요청하면 여러 에이전트가 협력해 특성 분석과 검증, 디버깅, 문제 해결까지 수행한다.
굽타 수석 부사장은 이 과정에 대해 “엔지니어가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 프롬프트만 주면 된다”며 에이전트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지멘스는 Solido Characterization에 이러한 기술을 적용해 기존 대비 처리 속도를 10배 높이고 토큰 비용은 10분의 1 수준으로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특정 AI에 종속되지 않는 ‘오픈 에코시스템’
AI가 EDA 환경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보안과 데이터 관리도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반도체 기업의 설계 데이터는 핵심 지식재산(IP)이기 때문이다.
지멘스는 이에 대한 해법으로 오픈 에코시스템을 강조한다. 고객이 특정 AI 모델에 종속되는 구조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원하는 LLM을 선택해 EDA 환경에 연결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Questa One Agentic Toolkit은 다른 EDA 벤더와의 연동을 지원하며, 고객은 자체적으로 선택한 LLM을 플랫폼에 적용할 수 있다. 설계 데이터 역시 온프레미스 환경에서 직접 관리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AI 적용 범위도 칩 설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멘스는 Fuse와 에이전틱 AI 기술을 칩에서 보드까지 전체 설계 스택으로 확대하고 있으며, RTL 설계와 검증부터 물리 구현 및 검증, PCB 설계에 이르는 EDA 워크플로우 전반을 AI와 연결하고 있다.
실리콘 제작 이전의 검증도 가속하고 있다. 가상 실리콘 프로토타이핑과 FPGA 기반 검증을 활용하면 실제 칩이 팹에서 나오기 전에 펌웨어와 소프트웨어 워크로드를 실행해 동작을 검증할 수 있다. 굽타 수석 부사장은 NVIDIA와의 협업 사례에서 수십조 개의 사이클을 불과 며칠 만에 검증했으며, 고용량 FPGA를 활용한 방식은 기존 대비 최대 1만 배 빠른 실행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AI의 목표는 엔지니어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더 빠른 혁신’
결국 지멘스가 그리는 AI-Native EDA의 방향은 AI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복잡성이 급증하는 반도체 설계에서 결과를 얻는 시간을 줄이면서도 엔지니어링 결과의 신뢰성을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다.
굽타 수석 부사장은 발표를 마무리하며 더 빠른 EDA 엔진과 Fuse 및 에이전틱 AI를 결합해 실행 방식을 더욱 지능화하면서도 고객이 기대하는 신뢰할 수 있는 결과를 지속적으로 제공하겠다는 전략을 강조했다.
엔지니어가 퇴근한 뒤에도 여러 AI 에이전트가 설계 작업을 이어가고, 스스로 오류를 찾아 수정한 뒤 다음 날 검증된 결과를 제시하는 환경. 지멘스가 제시한 AI-Native EDA는 AI가 단순한 설계 보조 도구를 넘어 반도체 엔지니어링 워크플로우 자체를 재설계하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